등 통증 원인에 관한 바이얼 '나는 목적지향적 존재다'에 대한....
3주간의 1정 연수. 대학 동기들은 거진 다 제작년 쯤 연수를 마쳤다. 지금 듣는 것이 사실 그때보다 시간도 줄고(절반) 어쩌면 훨씬 나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물론, 1정 연수를 빨리 했다면 호봉은 이미 빨리 승격되었겠지만. 아마 2011년쯤이지. 내가 갔어야 했던 때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일부터 회피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먹한 대학 동기들 만나기도 싫고, 특히 혼자만(아니, 명백하게 K는 나에 대해 이유없는 반감같은 것을 가진 것이 분명함을 나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K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과목도 아닌데,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한 불편함에 혼자 몸서리 치게 되는 그 상황이 너무 싫어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왜 1정 연수를 미뤘냐는 지인들의 질문에 ‘그냥 그 해에 다른 계획이 있었다’라고 말은 했지만..(사실, 그 때 한창 일본 파견 근무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던 터라 공부한답씨고 일정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속마음은 불편한 마주침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99%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리도 약했나...싶기도 하다.
어찌됐건, 시작되었다. 아는 사람도 없을터, 철저히 혼자인 시간을 즐겨보자는 마음도 컸고, 대학생으로 돌아가는 느낌도 좋았고. 공부하는 어려움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다. 거기 가서 훈련도 가야하니 혹시 필요할지 모를 책들도 바리바리 싸들고. 결론적으로 내가 공주에 머무는 동안 가져간 책 중에서 펼쳐 든 책은 단 한권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려 10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갔었다. 물론, 트랜서핑류의 책은 마음이 동할 때 한 페이지씩이라도 펼쳐볼 것에 대한 준비였고, 분별력 수업시 필요한 책들도 빼놓치 않았고, 결정적인 것은 어차피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보낼 건데, 영어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생각에 구입해 두었던 영어 문제지를 상,하 두권을 다 챙겨간 것. 매일 하던 영어 회화 책도 빼먹지 않고.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나는 한 번도 펼쳐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캐리어 짐 빼고도 12kg에 육박하는 나의 짐의 1/3은 책이었으리라.
첫째주, 오티 시간 때 괜한 긴장이 밀려온다.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기소개를 하란다. 50여명의 인원 속에서 1번부터 자기소개를 한다. “oo지역에서 온 xx에 근무하는 ~~라고 합니다. 블라블라~~“ 내 차례가 되었다. 예전부터 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이 있었다. 뭔가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나친 중요성이 부과된 것일까. 내가 나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도 모르겠고, 단지 생각나는 것은 그 짧은 순간 나의 목소리가 떨려서 발음이 조금 불분명 했다는 것. 그리고 중간에 내 이름을 말한것 같은데, 마지막에 한번 더 말한 것 같다는 것. 한마디로 제대로 쫄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하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 몇마디도 제대로 못하냐고. 그것에 대해 누군가 ‘저런 말도 제대로 못하나’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젠장-
연수 기간 동안 친한 사람 1명 정도는 만들어놔야 할 것 같아서 혼자 온 것으로 보이는 특수샘의 연락처를 받아둔다. 이후 그 샘과 함께 연수를 듣게 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작년에도 특수 과목이 개설되지 않아 특수 생물이 일반 생물반에서 열렸다더라. 그런데 특수 생물이 1등을 했다더라. 뭐 이런저런.
그런데 왜 자꾸 그 1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멤도는 것인지. 점수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관심 밖이었는데. 이 곳에서 나 하고 싶은 공부하고, 읽고 싶은 책 보고 한량 생활 하고 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는데, 왜 ‘1등’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엣 콕 박힌 것일까. 1등을 해야한다는 압박은 없었다...고 나를 설득했던 것일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수업 들으면서 그냥 다 외워서 시험 치면 되지 하는 생각에 수업 시간에 열심히 했다. 첫 째주 시험 준비도 열심히 했다. 나름 최선을 다 한 것. 3과목 중 흥미를 느끼는 과목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찾아가며 뇌세포 깨우면서 열심히 이해하고, 암기했다.
어찌됐건 첫째주 시험을 치르고 나서 1등에 대한 생각은 훨훨 날려보내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리긴 했으나, 그 때부터 은근한 나의 등통증이 미묘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른쪽 등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처음 느끼는 등쪽 통증이라 너무 낯설고, 너무 불편했다. 메트리스 탓인가. 답답한 2층 침대라서 그런가. 매일 열심히 운동도 하고 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페북에 짧은 글을 올리게 되었다. 침대는 과학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통증이. 페북의 내 글이. 정미경 선생님의 반응이. 나에게 예정된 배움을 위한 일련의 연쇄과정인가 싶기도 하다.
등이 아픈 원인 : “나는 목적지향적인 존재다”
'목적지향'을 보자마자, '아 나의 중요성이 높았구나..'라는 자각이 들었다. 1차적으로 떠오른 것은 알게 모르게 작용한 '평가'에 대한 나의 기대와 중요성. 그 이후로 계속 떠올렸다. 원인이 그러하니,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나는 목적지향적 존재가 아니다'라 말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순간부터 평가에 대한 나의 중요성을 내려놓기로 했다. 점수 따위, 경쟁 따위 부질없다. 같이 다니는 샘께도 은근히 가지고 있었던 경쟁의식을 내려놓기로 했다. 같이 수업 듣는 특수생물 샘들 중에 정말 열심히 하시는 샘들에 대한 나의 투사된 마음이 작용한 것일까. 열심히 하는 샘들에 대한 '경계'가 가련함?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으로 바뀌는 것도 관찰한다. 51번 게이트가 personality 선싸인(잘은 모르겠으나 경쟁과 관련된 게이트 였던 듯)의 영향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늘 마음속에는 '경쟁'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나를 지배했다.
둘째 주, 환경샘들(환경 샘들도 생물과 수업에 함께 들음)과 교양 공부를 함께 하면서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편안함 속에서 공부하는 것의 유익을 맛보고 나니, 어린시절부터 지나친 경쟁의식에 시달려왔던 내 신념을 다시금 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설정한 목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는 경쟁해야하는 존재다"라는 나의 신념. 착한척 하느라 절대 겉으로 드러내놓지 않는. 아예 대놓고, 경쟁하려는 자들을 동정하는, 비난하는 말을 타인들과 나누면서 나는 경쟁과는 동떨어진 유순한 사람인척하며 속으로는 이겨야한다, 잘해야 한다, 멋져 보여야 한다는 압박과 질투심으로 무장된 삶을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실로 그런 삶을 살아왔다.
어쨌건, 그 이후로 절 운동도 해보고, 같이 수업 듣는 선생님의 손 마사지(뭔가 알고 마사지 하시는 듯한)도 받아보고, 계속적으로 바이얼을 생각하며 나의 신념을 점검했다. 그렇게 셋째주, 연수가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연수가 끝나갈수록 통증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 같았다. 급기야 집으로 오는 날은 통증이 아예 사라진 것 같은 느낌마저 받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간혹 통증이 있긴 하지만)
등 통증에 관해 같이 다녔던 샘과 이야기를 나눴었다. 환경이 바뀌어서 일수도 있고, 독방이긴 하지만, 주인집과 같이 생활해야 했던 탓에 은근 긴장했을 수도 있고, 오랜 시간 부동의 자세로 수업을 받아야 했기에 몸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등등.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아마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의 감정이 이 통증과 스트레스를 유발했을 것이고, 그것을 해소하는 것 또한 나의 감정과 신념에 달려있으리라는 것을. 물론, 확실치는 않다. 바이얼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면, 내 통증이 어떻게 되었을까. 서서히 해소되었을까. 아니면 더 심해지거나 유지되었을까. 사실 알 수 없다. 견디지 못해 병원을 찾았을 수도 있고, 침을 맞고 호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는 목적지향적 존재라는 그 메시지가 나에게 또 다른 통찰을 가져다준 데에 있다. '목적 지향'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철저히 미래에 포커싱 된 표현이 아닌가. 뭔가를 이뤄야 한다. 미래의 상태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나의 상태가 결정되는. 나는 제너레이터인데. 제너레이터의 진실은 '현재'에 있는데. 현재의 반응. 현재에 반응한다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나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반응'이었지 않았을까. 미래를 염두해 둔 현재의 반응. 목적지향,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야한다는 사회적 가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그것이 내 잠재의식 속에서 철저히 현재에 반응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다시 돌아가 내가 가져온 책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책을 가져가야지...마음 먹었더라도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과연 내가 이것들을 다 소화할 수 있나. 다 소화할 필요가 있다. 좀 편하게 다녀와도 될텐데.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가서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목적(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나는 발빠르게 움직이고, 뭔가 생산적인 것을 해야한다는 신념. 실로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일이 허다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마 앞으로는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 않을테다. 모두 가져 가고 싶더라도 책들을 쫘악~펼쳐 놓고, 순간의 반응에 따라 딱 1권을 선택하리라. 심플하면서도 현명해보인다.
나는 목적지향적 존재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여러가지 경험이 쌓이면서 나만의 목적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나는 특별한 목적, 목표가 없지 않나. 설령, 뭔가 포착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목적(표)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철저히, 현재에 머물기로 한다. 나는 XX해야 한다는 모든 관념을 태워버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다만, 이 세상을 경험할 티켓을 가진 재수 좋은 사람일 뿐이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한다. 바이얼이 주는 메시지와 요즘 듣고 있는 '벙커1 특강 강신주 강의'가 합체되어 뭔가 허물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가식적이지 않은, 솔직한, 현재에 반응하는, 우아한(내가 최고로 치는 미적 기준)척 보이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우아하다 생각하며 감탄할 수 있는. 그렇게 쫄지 않고, 당당하게,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겠다. 이 전 같았으면 위 단어들이 참 추상적이고, 좋은 말만 같다 붙여놓은 표현으로 생각됐을지도 모르겠지만 특별한 나의 경험이 더해졌기에 한낱 텍스트 속의 표현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전 정미경샘과의 개인 세션 때 유사한 맥락이 있었는데. 똑같은 행동(시도)을 하더라도 그것을 하는 목적, 나의 매커니즘을 안다면 그것이 지니는 가치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정보'를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