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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애니 후기

 오늘은 결혼한 지 3년 만에 '친가'를 남편과 같이 정식으로 방문하는 즐거운 추석 연휴이다. 결혼한 이후 매 년마다 맞이했던 명절의 시기에서 감정 센터가 정의된 나로써는 민감하고 예민한 성향으로 시댁과의 관계를 어색해하고 낯설어했다. 또 오르락 내리락하는 감정 기복이 심해 나의 이러한 우울한 특성을 이해할 수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우울감'을 자주 느낀다고 여겼을 뿐. 휴먼디자인을 만나고 나의 예민한 특성을 알게 된 이상 이전의 예민함은 더 이상 별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별난 모습이 '나다운'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하지 못하고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며 나를 한심해하고 깎아내리던 시간이 얼마던 가? 나의 '다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면 한 없이 미안하고 다독이고 싶은 맘이 클 뿐이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길이라도 가야 내 마음 속에서 끙끙 앓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휴먼디자인을 공부하고 나답지 않던 '조건화'를 덜어낼수록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에서 나에 대한 관찰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었는지 그 이해도 조금씩이지만 알아가고 있다. 타인의 압력에 떠밀려 원치 않는 '선택'을 줄여감으로써 나다운 나를 존중하는 것 같다. 이제야 겨우 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처럼 숨통이 트인 기분이다.

1) 나는 열등한 존재이다->

 최근에 겪은 일들을 나열한 뒤 그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맺자면 이렇다. 이전에 로하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느꼈던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들. 그것에는 '열등감'이 주력했다. 열등한 '나'를 느낄수록 스스로에 대한 혐오도가 올라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어둡고 캄캄한 '음'의 세계로 더 없이 빠져들 뿐이다. 그것은 발을 한 번 들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과도 같다.

 지난 주 리플렉터 단짝 친구가 꾼 꿈에 이어 태어나 두번 째로 가위 눌린 경험을 겪은 나는 연달아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었다. 처음에 겪은 가위 눌린 기억에서는 저승사자로 보이듯 어두운 색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겪은 경험에서는 사신인 것처럼 새카만 암흑덩어리가 나에게 흡수되는 것마냥 달려들었기때문이다. 에너지, 드넓은 우주의 법칙, 카르마 등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공부하고 나니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싶다. 휴먼디자인의 신비로운 몸의 메카니즘에 공부하면서부터 이 학문을 알고 싶은 갈망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 하다. 타인과 다른 내가 가진 메카니즘은 무엇일까?

 공부할수록 아는 것과 별개로 포괄적이고 거대한 '나'의 세계는 캐내야 하는 광산인 것처럼 계속 다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8월 중순부터 4단 심사를 보던 당시에도 느꼈던 이질적인 나의 모습을 말하자면 이렇다. 뜬금 없이 아이들이 자그마한 실수를 보여도 너그럽게 이해하는 할머니의 포근한 마음이 생겼었다는 것과 아이들 이름보다는 '아가, 아가'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손녀와 손자를 대하는 모든 할머니의 마음은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푸근한 느낌과 하나라도 더 챙기고픈 뭉클한 감정을 많이 느꼈기에 프로젝터의 전략마저 무시할 정도였다. 그러한 현상이  9월 중순이 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내 몸에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 있는 듯한 이질적인 낯선 느낌이 말이다. ㅜ

 이분의 정체는 시댁 쪽 나의 시할머니쯤 되는 분으로 드러난 것 같다. 시할머니께서 살았었던 시대적 배경으로는, '남아선호사상'의 집단무의식이 짙게 나타나 폐쇄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남자는 당연히 바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여자는 아이 돌보기와 함께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도 강했기에 글을 배운다거나 일을 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현실이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었을까?'라고 상상해보니 비범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을 지도 모를 시할머니의 휴먼디자인 차트 그래프를 뽑고 싶었다.  

 남편의 친할머니에게 빙의된 채 느꼈던 감정으로 열등감, 우울감, 울적함, 슬픔, 무기력 등 다양했다. 평소와 다르게 뽀송했던 나의 손과 발에서 식은땀이 양말을 젖게 할 정도로 나는 것을 보면

이분이 살았을 적 아팠던 모습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열등감에 대한 대상으로는 시할머니의 남편이었는데 열등감의 수치가 큰 편이었다. 그 상태로는 남편을 사랑한 수치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할머니의 열등감의 큰 원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남편과 결혼을 서둘렀을 적 상황이 주도권이 아닌 것을 떠올리면 시할머니가 살았던 삶의 대부분이 주도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건 아닐가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얼마나 많은 제한을 받았었을지 시할머니의 삶을 조금 떠올려도본다. 나나, 남편이 주도권으로 이룬 결혼은 아니었지만 전략과 때를 기다린 주도권으로 다시 한걸음씩 나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나답게 에서 '우리답게'로 삶의 트랙이 변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를 5명이나 낳은 시할머니가 아들만이 가득한 집에서 육아와 살림으로 가정에 보탬이 되느라 스스로가 주체인 삶이 아닌 삶을 살았던 부분에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기까지했다. 넷째 아들인 시아버님에게 있다가 다시 내게 오신 거지만 같은 여인으로써 경이로운 부분은 인정하고 싶다. 희생이 사랑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을 수 있는 시할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세션하는 동안 좋은 곳으로 올라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건히 임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나로써는 그분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 물론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간접적이나마 그분의 삶에 공감을 하며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여인으로 살았던 시할머니가 내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결혼을 하기 전의 삶과 결혼을 한 삶을 정말이지 이렇게 큰 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가 싶다.

시할머니께-

함께 한 달간의 가까운 시간을 지내며 뜻하지 않게 에고와 마인드로 말이 많았고 감정에 의한 즉흥적인 결정도 하며 큰 감정의 파동에 평소보다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사셨던 삶의 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에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간 얼마나 외롭고 답답했을까요? 손주며느리가 시할머니께 인사드리는 것 같아 되려 짧은 기간이 의미있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손주와 손주며느리가 알콩달콩 지내는 삶을 편히

지켜보시어요:)

2) 시간낭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한 달 약간 안 되게 지내는 동안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평소 보는 장르의 반대인 영상을 찾아서 재미있게 '낄낄'거리며 보고 있었던 것. 그 영상에는 초등학생 때 즐겨봤던 공포물 '위험한 초대'라는 방송과 무속인이 사례자의 빙의를 속 시원하게 해결을 돕는 일화가 담겨있었다. 세션 도중에 떠오른 경험에서 나답지 않은 모습을 찾았을 때의 몸에서 반응하는 그 소름이란... ㅜㅜ !

 시간 낭비하고 있는 것에는 위에 말한 것들이 전부였다. 또 휴먼디자인 책과 <리얼리티 트렌서핑>이란 책을 읽으려고 하면 책 표지도 보기 싫을 만큼 마인드와 저항감이 엄청 셌었다. 평소보다 두통도 잦았었다. 몸은 나보다 먼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알려주는 신호였지만 마인드가 발동되면 둔해지는 나로써는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전략만이라도 지키면 좋은 점이 시간낭비 하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고 현시를 덜하도록 하는 점이다. 온전한 나로써 지내지 않는동안 주도권이 제로로 나온 것에 경악하기도 했다.

3) 새롭고 좋은 전략을 기꺼이 선택하는 가?->

기꺼이 선택을 한다. 때 아닌 빙의를 체험한 후로는 휴먼디자인에 나오는 전략과 주도권이 우리네 삶에 이리 중한 것인지 몸으로 느꼈기때문이다. 나 아닌 상태에서 맞이하는 거센 저항감이란..ㅜ 그 저항감에서 전해지는 씁쓸함은 정말 높은 에너지에 비할 바가 못된다. 굵고 짧게 요약해서 정말 삶이, 삶이 아니다.

4) 나는 논쟁을 좋아하는 존재이다->

삶이 삶이 아닌 상태에서 느끼는 한 가지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느끼는 게 전부라고 믿는 마인드가 엄청 거세다는 점이다. 특히 61-24가 정의된 내가 남편과 한 번 과거에 옳지 않은 선택으로 이혼까지 막장으로 갔을 때를 떠올리면 남는 것은 '몸뚱아리를 지배한 감정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상태일 때 주의할 것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의존을 했던 경험을 한 나이기에, 더욱 사람하고의 관계에서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의존을 했던 사람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드는 게 싫어 한동안 기피도 했었다. 그러나 피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에 내 상태가 괜찮을 때 만나는 것을 주력으로 한다. 또 그 사람의 달라진 점을 읽어낼 때 또한 내 상태를 먼저 존중한 뒤 살피든가 한다. 사람을 만나면서 대하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이번 추석 연휴 동안 시댁 식구들과의 짧은 대면도 선생님 말씀처럼 피할 수 없을 시 즐기면 된다는 부분에 조금 힘을 얻고 직면한 것이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또 남편이 만나는 친구들을 살피는 과정도 나대로 즐기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서툰 부분이 많으면 어떤 가? 남처럼 잘하기보다 그 과정에 임하는 나를 격려하고 지켜보는 것만으로 신기하리만치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조금은 나의 삶에 여유가 생긴 것에 또 한 번 놀라웠고 숨통이 트여 주변을 둘러보고 구경할 수 있는(?)사실에 무한 감사할 뿐이다.

 오늘은 결혼한 지 3년 만에 '친가'를 남편과 같이 정식으로 방문하는 즐거운 추석 연휴이다. 결혼한 이후 매 년마다 맞이했던 명절의 시기에서 감정 센터가 정의된 나로써는 민감하고 예민한 성향으로 시댁과의 관계를 어색해하고 낯설어했다. 또 오르락 내리락하는 감정 기복이 심해 나의 이러한 우울한 특성을 이해할 수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우울감'을 자주 느낀다고 여겼을 뿐. 휴먼디자인을 만나고 나의 예민한 특성을 알게 된 이상 이전의 예민함은 더 이상 별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별난 모습이 '나다운'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하지 못하고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며 나를 한심해하고 깎아내리던 시간이 얼마던 가? 나의 '다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면 한 없이 미안하고 다독이고 싶은 맘이 클 뿐이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길이라도 가야 내 마음 속에서 끙끙 앓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휴먼디자인을 공부하고 나답지 않던 '조건화'를 덜어낼수록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에서 나에 대한 관찰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었는지 그 이해도 조금씩이지만 알아가고 있다. 타인의 압력에 떠밀려 원치 않는 '선택'을 줄여감으로써 나다운 나를 존중하는 것 같다. 이제야 겨우 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처럼 숨통이 트인 기분이다.

1) 나는 열등한 존재이다->

 최근에 겪은 일들을 나열한 뒤 그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맺자면 이렇다. 이전에 로하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느꼈던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들. 그것에는 '열등감'이 주력했다. 열등한 '나'를 느낄수록 스스로에 대한 혐오도가 올라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어둡고 캄캄한 '음'의 세계로 더 없이 빠져들 뿐이다. 그것은 발을 한 번 들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과도 같다.

 지난 주 리플렉터 단짝 친구가 꾼 꿈에 이어 태어나 두번 째로 가위 눌린 경험을 겪은 나는 연달아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었다. 처음에 겪은 가위 눌린 기억에서는 저승사자로 보이듯 어두운 색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겪은 경험에서는 사신인 것처럼 새카만 암흑덩어리가 나에게 흡수되는 것마냥 달려들었기때문이다. 에너지, 드넓은 우주의 법칙, 카르마 등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공부하고 나니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싶다. 휴먼디자인의 신비로운 몸의 메카니즘에 공부하면서부터 이 학문을 알고 싶은 갈망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 하다. 타인과 다른 내가 가진 메카니즘은 무엇일까?

 공부할수록 아는 것과 별개로 포괄적이고 거대한 '나'의 세계는 캐내야 하는 광산인 것처럼 계속 다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8월 중순부터 4단 심사를 보던 당시에도 느꼈던 이질적인 나의 모습을 말하자면 이렇다. 뜬금 없이 아이들이 자그마한 실수를 보여도 너그럽게 이해하는 할머니의 포근한 마음이 생겼었다는 것과 아이들 이름보다는 '아가, 아가'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손녀와 손자를 대하는 모든 할머니의 마음은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푸근한 느낌과 하나라도 더 챙기고픈 뭉클한 감정을 많이 느꼈기에 프로젝터의 전략마저 무시할 정도였다. 그러한 현상이  9월 중순이 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내 몸에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 있는 듯한 이질적인 낯선 느낌이 말이다. ㅜ

 이분의 정체는 시댁 쪽 나의 시할머니쯤 되는 분으로 드러난 것 같다. 시할머니께서 살았었던 시대적 배경으로는, '남아선호사상'의 집단무의식이 짙게 나타나 폐쇄적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남자는 당연히 바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여자는 아이 돌보기와 함께 집안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도 강했기에 글을 배운다거나 일을 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현실이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었을까?'라고 상상해보니 비범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을 지도 모를 시할머니의 휴먼디자인 차트 그래프를 뽑고 싶었다.  

 남편의 친할머니에게 빙의된 채 느꼈던 감정으로 열등감, 우울감, 울적함, 슬픔, 무기력 등 다양했다. 평소와 다르게 뽀송했던 나의 손과 발에서 식은땀이 양말을 젖게 할 정도로 나는 것을 보면

이분이 살았을 적 아팠던 모습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열등감에 대한 대상으로는 시할머니의 남편이었는데 열등감의 수치가 큰 편이었다. 그 상태로는 남편을 사랑한 수치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할머니의 열등감의 큰 원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남편과 결혼을 서둘렀을 적 상황이 주도권이 아닌 것을 떠올리면 시할머니가 살았던 삶의 대부분이 주도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건 아닐가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얼마나 많은 제한을 받았었을지 시할머니의 삶을 조금 떠올려도본다. 나나, 남편이 주도권으로 이룬 결혼은 아니었지만 전략과 때를 기다린 주도권으로 다시 한걸음씩 나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나답게 에서 '우리답게'로 삶의 트랙이 변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를 5명이나 낳은 시할머니가 아들만이 가득한 집에서 육아와 살림으로 가정에 보탬이 되느라 스스로가 주체인 삶이 아닌 삶을 살았던 부분에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기까지했다. 넷째 아들인 시아버님에게 있다가 다시 내게 오신 거지만 같은 여인으로써 경이로운 부분은 인정하고 싶다. 희생이 사랑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을 수 있는 시할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세션하는 동안 좋은 곳으로 올라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건히 임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나로써는 그분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 물론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간접적이나마 그분의 삶에 공감을 하며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여인으로 살았던 시할머니가 내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결혼을 하기 전의 삶과 결혼을 한 삶을 정말이지 이렇게 큰 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가 싶다.

시할머니께-

함께 한 달간의 가까운 시간을 지내며 뜻하지 않게 에고와 마인드로 말이 많았고 감정에 의한 즉흥적인 결정도 하며 큰 감정의 파동에 평소보다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사셨던 삶의 아주 미약한 부분이나마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에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간 얼마나 외롭고 답답했을까요? 손주며느리가 시할머니께 인사드리는 것 같아 되려 짧은 기간이 의미있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손주와 손주며느리가 알콩달콩 지내는 삶을 편히

지켜보시어요:)

2) 시간낭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한 달 약간 안 되게 지내는 동안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평소 보는 장르의 반대인 영상을 찾아서 재미있게 '낄낄'거리며 보고 있었던 것. 그 영상에는 초등학생 때 즐겨봤던 공포물 '위험한 초대'라는 방송과 무속인이 사례자의 빙의를 속 시원하게 해결을 돕는 일화가 담겨있었다. 세션 도중에 떠오른 경험에서 나답지 않은 모습을 찾았을 때의 몸에서 반응하는 그 소름이란... ㅜㅜ !

 시간 낭비하고 있는 것에는 위에 말한 것들이 전부였다. 또 휴먼디자인 책과 <리얼리티 트렌서핑>이란 책을 읽으려고 하면 책 표지도 보기 싫을 만큼 마인드와 저항감이 엄청 셌었다. 평소보다 두통도 잦았었다. 몸은 나보다 먼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알려주는 신호였지만 마인드가 발동되면 둔해지는 나로써는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전략만이라도 지키면 좋은 점이 시간낭비 하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고 현시를 덜하도록 하는 점이다. 온전한 나로써 지내지 않는동안 주도권이 제로로 나온 것에 경악하기도 했다.

3) 새롭고 좋은 전략을 기꺼이 선택하는 가?->

기꺼이 선택을 한다. 때 아닌 빙의를 체험한 후로는 휴먼디자인에 나오는 전략과 주도권이 우리네 삶에 이리 중한 것인지 몸으로 느꼈기때문이다. 나 아닌 상태에서 맞이하는 거센 저항감이란..ㅜ 그 저항감에서 전해지는 씁쓸함은 정말 높은 에너지에 비할 바가 못된다. 굵고 짧게 요약해서 정말 삶이, 삶이 아니다.

4) 나는 논쟁을 좋아하는 존재이다->

삶이 삶이 아닌 상태에서 느끼는 한 가지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느끼는 게 전부라고 믿는 마인드가 엄청 거세다는 점이다. 특히 61-24가 정의된 내가 남편과 한 번 과거에 옳지 않은 선택으로 이혼까지 막장으로 갔을 때를 떠올리면 남는 것은 '몸뚱아리를 지배한 감정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상태일 때 주의할 것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의존을 했던 경험을 한 나이기에, 더욱 사람하고의 관계에서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의존을 했던 사람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드는 게 싫어 한동안 기피도 했었다. 그러나 피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에 내 상태가 괜찮을 때 만나는 것을 주력으로 한다. 또 그 사람의 달라진 점을 읽어낼 때 또한 내 상태를 먼저 존중한 뒤 살피든가 한다. 사람을 만나면서 대하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이번 추석 연휴 동안 시댁 식구들과의 짧은 대면도 선생님 말씀처럼 피할 수 없을 시 즐기면 된다는 부분에 조금 힘을 얻고 직면한 것이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또 남편이 만나는 친구들을 살피는 과정도 나대로 즐기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서툰 부분이 많으면 어떤 가? 남처럼 잘하기보다 그 과정에 임하는 나를 격려하고 지켜보는 것만으로 신기하리만치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조금은 나의 삶에 여유가 생긴 것에 또 한 번 놀라웠고 숨통이 트여 주변을 둘러보고 구경할 수 있는(?)사실에 무한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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