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으로도 3-60채널에 대한 목마름은 증폭되고 있지만 어디서 갈증을 해소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로 지내온 시기가 길었던 지라 내 채널(특히, 포맷채널)을 이해하고, 방향성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더불어 바이얼을 통한 일대일 세션이 처음인지라 궁금증도 컸었다. 바이얼 세션이 궁금하기도 했고, 최근 읽고 있는 ‘의식혁명’의 키네지얼러지를 적용한 실용적 분야이기도 해 검증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개인의 탈조건화 과정의 경험담은 과히 흥미로웠다. 부럽기도 했다. 이전의 선생님 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선생님만의 시끄럽지 않은 정돈된 강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부담스럽지 않고, 불편하지 않은. 하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3-60채널이 제대로 발현되면 저러한 모습일까? 끝없어 보이는, 아주 오랜 시간의 moodiness와 우울함을 견뎌내고 결실된 열매의 맛은 본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하겠는.
바이얼 세션.
“나는 동정 받을 존재다”
맵핑을 해본다. 동정에 대한 단어의 느낌, 과거의 기억들, 현재의 나의 상태.
‘동정’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느낌이 썩 유쾌하진 않다. 동정이 주는 첫인상을 나열해본다.
‘약함(약자), 보호받고 싶은, 피해자라는 느낌, 의존적, 수동적’
하나같이 (보여지는 혹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진짜 내 모습인) 나를 묘사하는 의미들이 줄줄 딸려나온다.
나의 과거 기억도 되짚어 본다.
하나. 가족사가 만들어 낸 나의 인식...
부모님의 이혼으로 외가댁에서 시작된 나의 어린 시절은 스스로 나는 가엾고, 불쌍한 존재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냈다. 외삼촌들에 비해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중간정도의 생활을 활을 했음에도 난 늘 피해자이고, 약자였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조용히 주목받고 싶어하는 양자리적 기질. 또 가끔씩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간의 불화, 외할아버지의 불같은 성향으로 인해 무지막지 외할머니를 호통치시는 기억들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가족, 집’이란 최대한 빨리 독립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신념이 어쩜 나를 물리적 독립을 가능케 한 힘을 제공하긴 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나를 더욱 나약하고, 의존적으로 만든 동정의 대상이 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찌할 수 없어’ 저절로 생성된 나의 인식과 신념.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의 인식을 재조종 해 줄 ‘무언가의 부재’이다.
두 번째. 대학 때 겪어야 했던 소외감에 대한 기억.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사랑을 했다.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었고, 같이 있으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사랑의 이름으로 다가온 나에게는 의존의 대상이었지만..)거기까진 좋았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그런데 뭔가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참 우습게도난 질투의 대상이 되면서 근 이년간 누군가에게 투명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나의 성향상 나는 그들을 피해다녀야 마음이 놓였고, 어마어마한 감정의 소욜돌이 속에서 사람과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켜야 했다. 말 그대로 나는 ‘동정받아야 마땅한’존재가 된 것이다. 사랑을 얻었지만, 사람을 잃은. 아니, 해본 적도 없는 나에 대한 사랑의 기회를 잃은.
직관인지, 잉카네이션의 penetration의 영향인지, 빠르게 전해져오는 환경적(사람, 분위기 등) 코드들. 그로 인해 나는 더 힘들었다. 차라리 곰처럼 무딘 성향이면 나았으련만.
그 당시엔 나에게 어떤 선택의 대안이 없었다. 방법을 몰랐으니. 나의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나를 성장시키는 데 써야 할 에너지들을 모두 감정적으로 함몰시켜버렸고, 외부로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분산시켜 나는 살아있지만 껍데기 뿐인 존재였다. 상황이 그렇게 될수록 나는 더욱 나의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고, 의존하게 되었다. 그 당시엔 명상도 몰랐고, 지금의 훈련의 맥락과 같은 지식(정보)은 어디서도 접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나의 부적절한 성향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나의 기질, 남들과 다른 나의 탓.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저 나의 특성화된 디자인을 가지고 있을 뿐인, 매커니즘적 생명체에 불과한데 말이다.
내 짧은 삼십년 조금 넘는 인생. 그 중, 삶에 대한 인지가 시작된 시기를 7세로 본다면 24년 남짓한 시간을 내가 나를 약자요, 피해자요, 동정 받을 대상이라는 인식을 하고 살아온 셈이다. 내 세포 속속들이 특정 상황에 쳐하면 ‘우리는 동정받을 세포들이야..’라는 인식을 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으. 아찔하다.
하지만 위 두 가지는 내가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고, 치유되고 있다 생각한 것들인데, 왜 굳이 이 바이얼이 나왔을까. 나를 가로 막고 있는 특정 기억에 대한 인식에서 더 깊이 들어가 보라는 신호일까. 더 깊은 감정적 수용이 필요한 것일까.
내가 나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나의 위치를 점검해본다. ‘나는 동정받을 존재다’에 대해 스스로 부인할 수 없는 바, 그러한 인식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차라리 동정받고 싶은, 두려운, 보호받고 싶은’
역시나 나는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일어서기에 두려워하는 존재다. 의식의 차원을 기준으로 나의 의식을 측정한 결과 백 얼마의 대역으로 ‘두려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나의 이슈들을 해소하고 나면 나의 의식의 레벨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이슈를 해소하는 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의식의 자유함‘
자각을 하고 나면 교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의식혁명의 서문에 보면 저자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만으로도 의식레벨이 높아진다 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HD&바이얼 세션을 통해 나는 나의 내면 깊숙이,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인식의 범위 내에 있는 사건들을 다시금 꺼내놓고, 그 당시 의식이 지금보다 낮았을 때의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재생해본다. 그리고 지금 조금 변화된 나의 의식수준으로 객관적으로 검토해본다.
내가 과연 정말, 동정 받을 존재인가.
내가 약한 존재인가. 내가 피해자인가.
나는 3/6 프로파일, 인테그레이션-인디비줠 우세형의 G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자주적일 수 있는, 나만의 직관(느낌)에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내면의 부적절한 신념으로 인해 위축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쩜, 3-60 포맷 채널을 발현을 위한 가장 밑작업이 될 수 있는 것이 ‘동정받을 대상이라 생각하는 나’에 대한 재인식, 이와 관련한 감정적 해소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변화를 위한, 내 삶을 재정렬 시키기 위한, 내 디자인대로 살기 위해 ‘한방에’라는 생각은 가당찮다. 천천히,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 하면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번 세션을 하며 느낀것은 그 출발점에서 나에게 더 적절한 정보로 포커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어디에 나의 에너지를 써야할지, 통증을 느끼지는 않지만 내 몸 어디가 병들어 있고, 어디를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